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줄피카르 알리 부토 (문단 편집) == 개요 == 줄피카르 알리 부토(신디어: ذوالفقار ڀٽو; 우르두어: ذُوالفِقار بُھٹّو)는 파키스탄의 변호사이자 정치인으로 [[1971년]]부터 [[1973년]]까지 [[파키스탄]] 4대 대통령을 역임했으며 1973년부터 [[1977년]]까지 파키스탄의 제9대 총리를 역임했다. 또한 [[파키스탄 인민당]](PPP)의 창립자였으며 [[1979년]]에 처형될 때까지 당 대표를 역임했다. 오늘날의 파키스탄 [[신드|신드 주]]에서 태어나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 캠퍼스]]와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공부했으며 변호사 자격증을 딴 후 [[이스칸데르 미르자]] 초대 대통령의 내각 위원 중 한 명으로 정계에 입문했다. [[1958년]] [[아유브 칸]]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켜 대통령이 되었지만 부토는 내각에 남아 여러 직책을 거쳤고 [[1963년]] 외무장관으로 임명되었다. [[1967년]] [[파키스탄 인민당]](PPP)을 설립하고 [[1970년]] [[야히아 칸]] 대통령이 실시한 총선에 문제를 제기하기도 했다. 당시 여당이 가장 많은 의석을 차지했지만 야당인 PPP는 서파키스탄(오늘날의 파키스탄)에서 의석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1971년]] 3월 당시 [[방글라데시 독립전쟁|동파키스탄에서 독립전쟁이 일어났고]] 결국 파키스탄은 인도-방글라데시 연합군에게 패배하면서 같은 해 12월 동파키스탄은 독립해 오늘날의 [[방글라데시]]가 된다. 야히아 칸 대통령이 패전에 대한 책임을 지고 물러나자 부토는 [[1971년]] [[12월 20일]] 4대 대통령에 취임한다. [[1972년]] 7월, 부토는 심라 협정에 서명한 후 43,600명의 전쟁 포로와 5,000평방마일의 땅을 [[인도]]로부터 되찾았다. 그는 [[중국]]과 [[사우디아라비아]]와의 관계를 강화하고 [[방글라데시]]를 국가로 인정했으며 [[1974년]] [[라호르]]에서 제2차 이슬람 회의 기구 정상회의를 개최했다. [[1973년]] 의회가 새로운 헌법을 만장일치로 승인하는 것을 보았고, 그 때 부토는 파이잘 일라히 차우드리 대통령을 임명하고 본인은 총리로 영전했다. 또한 [[파키스탄의 핵개발|국가의 핵 프로그램에 시동을 거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부토가 파키스탄의 신생 산업, 의료 및 교육 기관의 대부분을 국유화한 것은 경제 침체에 부딪혔다. [[발루치스탄]]의 지방 봉건 정부를 해산한 후, [[1973년]] 이 지역에서 군 작전을 명령하여 수천 명의 민간인 사상자가 발생했다. 전국적인 혼란에도 불구하고 PPP는 [[1977년]] 총선에서 큰 차이로 승리했다. 그러나 야당은 광범위한 투표 조작과 폭력이 전국적으로 시행되었다고 주장했다. 같은 해 7월 5일, [[무함마드 지아울하크]] 장군에 의한 군사 쿠데타로 추방되었고, [[1979년]] 파키스탄 대법원에서 정적 살해를 승인한 혐의로 재판을 받고 처형되었다. 민족주의와 세속주의에 기반한 정치인이며 정적을 탄압하고 인권 침해를 자행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하지만 가장 위대한 파키스탄 지도자를 꼽을 때 반드시 언급되는 인물이며 딸 [[베나지르 부토]]는 두 차례 총리로 선출되었고 베나지르의 남편이자 사위인 아시프 알리 자르다리는 대통령으로 재임했다. 무엇보다 파키스탄은 지금은 이슬람권에서도 꼴통 취급받는 막장 이슬람 국가이지만 부토 시절까지만 해도 세속주의가 널리 퍼지고 나름 정상적으로 돌아가는 나라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